2004년 Younghoe.info v1(엠파스 블로그)에 정리했던 글을 옮겨봅니다.

있음과 없음
윤구병 지음/보리

줄서기가 아닌 함께 살기
우리는 줄서기 문명속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아서 함께 사는 것 즉, 사람을 대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잘하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 더 갖고, 조금 못한다고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섬뜩하단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잔혹한 문명에 젖어 있으면서 다른 사람만 탓하고 있던 내가 부끄러움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신 변산 공동체 설립자 윤구병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말버릇

학문하는 사람들의 말버릇에 대해서 몇 마디 할까 합니다. 여러 학생들은 그 동안 학문 동네의 사투리가 귀에 익어 내가 일상 용어로 지껄이는 말을 주의 깊에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할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도 학문 사투리를 섞어 '오류 판단의 존재론적 그건'가 어쩌고 '실천상 오류의 존재론적 분석'이 저쩌고 하고 떠들어 댔다면 여러분 중에는 '와, 굉장하다. 이런 존재론 강의는 전무후무한 명강의라 할 만하다.'고 감탄할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빚어진 사투리와 학문 사투리는 다릅니다. 그냥 사투리는 진솔하지만 학문 사투리에는 뻐김과 잘난 체함이 깃들어 있지요. 머리만 굴려서 먹고 사는 사람, 이른바 정신 노동자가 손반을 부지런히 놀려서 먹고 사는 사람, 이른바 육체 노동자를 속이고 겁주어서 그 사람들의 몫을 가로채려고 해 온 '정보 소통의 인위적 난관 조성'(어때요? 그럴듯해 보이지요?)의 음모가 학문 사투리에서는 물씬 풍깁니다. 그러니까 정신 노동자라는 특권 계급이 자기들끼리 정보를 독점하려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써서 보통 사람들을 따돌리는 야바위 노름의 속임수가 학문 용어에는 많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이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끝내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우스갯거리가 될 날이 멀지 않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윤구병님의 '있음과 없음' 중에서
저는 학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학교를 오래 다녔더니 이 병에 감염된 것 같습니다. 더러는 제가 속한 소프트웨어 산업과 무관한 사람에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할 수도 없다고 느낍니다. 그만큼 스스로가 위에서 말하는 학문 사투리에 중독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저 사람은 이 말을 모르니가 이야기 할 수 없다.'라는 식이죠. 이러한 장벽을 허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위 내용을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의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같은 것의 근거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럿의 근거는 없는 것이고 다는 것의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에 있는,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저마다 다 다른 고유 명사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그것들의 기본 특성이 모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에서는 참된 인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파악하는 없는 것은 모순된 것이고, 모순된 것은 여럿크기바뀜이 있는 현상 세계의 반영물로서 우리의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무언가를 안다고 해봐야

이수영이 부른 '늪'이란 노래가 좋아서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조관우가 불렀다. 나는 예전에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던 친구를 떠올렸다.
나에게 그 친구는 이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로 기억되고
내가 힘이 들 때,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친구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지금 이 친구가 아직 '늪'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또, 자신이 늪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만큼 좋아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안다는 것은
오감을 통해 머리로 해석해서 안다는 것은
작은 조각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잘게 부숴진 계란 껍질 몇 개보다 못할런지도 모른다.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렴풋하게나마 미뤄짐작해본다.
내가 안다는 것은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진리를 논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섣불리 안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문은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학문이라는 영역은 파리 뒷다리 하나 연구하는 데에도 평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자네의 그 표정을 만드는 힘도 자네의 과거일세

우리가 지난날이다. 과거다. 있었던 것이다.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못박는 그 무엇은 스스로 아직도 흐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흐를 것이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켜 완고하게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요동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거의 모습을 직관하는 힘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라느니, 우리의 의식, 우리의 기억, 우리의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우리 머리나 몸에 간직된 정보를 통해서만 현재나 미래에 힘을 미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힘과 됨의 영역입니다.

존재론에서 배우는 객체 설계 팁(Tip)

윤구병님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중에서 객체 설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 발췌합니다. 혹, 이 내용을 보시고, "있음과 없음"에 대한 판단을 하는 우는 범하지 마세요. 책 전체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보기는 힘들거든요.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이 강의실 밖에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서 있는데, 우리가 저것이 자동차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저것이 가진 겉모습이 공중 전화나 소나무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비치는 겉모습만으로는 저것이 진짜 자동차인지 자동차 모형인지 잘 모를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 촬영장이 좋은 예가 되겠지요. 겉으로 보면 솟을대문에 으리으리한 집인데, 안에 들어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어로 세트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창 밖에 보이는 저 자동차도 시늉만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저것이 진짜 자동차인지 아닌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야, 나가서 타고 운전해 보면 되지요.
아주 단순하고 실용적인 확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일 운전을 해 보아도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요?
기름이 떨어졌는지 살피지요.
기름이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면요?
“……”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자동차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그 자동차의 부속품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고, 그 부속품들이 제자리에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를 분해해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분해하면 이제까지 겉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부속품들이 여러 모습, 감추어져 있던 한계가 드러납니다.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독립해 있는 이 부속품들은 저마다 하나하나 떨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자동차를 완전히 분해하고 나면 자동차의 구조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능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속품들로 조각조각 분해된 자동차는 이미 하나의 자동차이기를 그치고, 이런저런 부품들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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